빌레몬서 수신자 찾기
빌레몬서 수신자 찾기
전통적으로 빌레몬서의 수신자는 빌레몬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을 통해 더 다양한 수신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신의 머리말에는 수신자로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그리고 교회를 언급하고 있지만(1b-2절), 서신의 본론(3-22절)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너’(‘쑤’, su), 라는 인칭대명사만 등장하고 있으며, 다시 맺음말 부분에서는 ‘너희(들)의 심령에게’ (‘메타 투 프뉴마 토스 휘몬’) 인사하는 말이 등장한다(25절). 이러한 바울의 통일되지 않는 인칭 표현은 빌레몬서의 수신자가 오직 빌레몬 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열린 가능성들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빌레몬서 수신자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모두 다루지 않고,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그리고 교회를 공동 수신자로 보는 가능성을 다루고자 한다.
바울은 서신의 머리말과 맺음말 부분에만 복수의 표현을 사용하고, 본론 전체에서는 끊임없이 일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 수신자로써의 가능성을 열여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신의 본론에서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서신의 머리말에 암시하곤 하는 바울의 서신 서술 특징과, 그 당시 문화 사회적 상황 속에서의 본문을 해석할 때에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들 때문이다.
본론의 중심 내용을 머리말에 복선으로 미리 깔아두어 본론에서 전하려는 내용을 강렬하게 만드는 방식을 바울이 종종 사용한다고 볼 때, 아무런 의미 없이 바울이 머리말에서 빌레몬뿐만 아니라, 압비아와 아킵보, 그리고 교회를 언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단순히 빌레몬에게 인사하면서, 겉치레로 그들의 이름을 거론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위에서 살펴본 바울의 서신 서술 특징과 같이, 바울이 본론에서 전하려는 내용과 분명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들의 이름도 함께 거론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전하려고 하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고, 만일 이 서신이 빌레몬뿐만 아니라, 복수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보내는 것이었다면, 왜 바울은 본론에서 지속적으로 2인칭 단수 ‘너’ 혹은 ‘그대’ 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몇몇 참고 주석에서는 ‘압비아’를 빌레몬의 아내로, 아킵보를 그들의 아들로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압비아’가 빌레몬의 아내인지, 과부가 된 그의 누이인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의 어린 누이일지, 빌레몬의 어머니 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에게 ‘자매’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아킵보가 빌레몬의 아들인지, 그의 누이의 아들일지, 그가 누구인가에 관한 추론들이 있지만, 바울이 그를 에바브로디도에게 사용했던 ‘함께 군사 된 자’(빌 2:25)로 표현한 점과 ‘주 안에서 맡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골 4:17)고 언급한 것을 볼 때에, 아마도 그는 빌레몬의 집에 모였던 교회의 책임 있는 일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위의 가능성들을 근거로 할 때에, 빌레몬은 압비야와 아킵보를 구성원으로 하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 볼 수 있겠다. 바울은 아마도 빌레몬을 이 가족의 대표로서 서신의 본론에서 그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며, 이인칭 단수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이 가족 전체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바울은 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일까?
빌레몬서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사랑과 화해이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과 화해의 복음을 그저 편지 안에 가둬두지 않고, 빌레몬의 가정과 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 공동체가 이것을 실천하고 ‘가정’과 ‘집’이라는 관계와 삶의 공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훈련하고(practice) 이 혁명적인 복음의 삶을 살아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가족의 노예였다면, 그는 빌레몬 뿐만 아니라, 매일의 일상 가운데 압비아와 아킵보와 함께 생활하며 주인과 노예의 신분으로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서신에서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닌 ‘형제’로 받아달라는 부탁, 즉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그의 사랑하는 ‘형제’ 빌레몬과 ’ 자매’ 압비아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혁명적 메시지는 새롭고 유행하는 하나의 이론이나 시대의 사조가 아니라, 살아있고, 그들이 삶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의 과제로 빌레몬 가정 속으로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오네시모를 대하였다면, 그는 오네시모를 빌레몬 가정에 돌려 보내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신 23:15-16). 만일 바울이 로마법을 따라 빌레몬에게 조언을 주고자 했다면, (그를 사형에 처하라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본론에서 끊임없이 거론되는 사랑과 용서의 복음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오네시모가 복음 안에서 더 이상 종이 아닌, 사랑받는 한 형제로 그들과 묶여있음을 빌레몬 가정이 깨달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새로워진 가정 안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강력하게 살아내길 요청하는 것이다.
바울은 압비아를 “자매”로, 빌레몬을 “동료”와 “사랑하는 형제”로, 오네시모를 그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혈연적, 가족관계 안에서 부를 수 있는 호칭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맺은 관계의 현실,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 새로워진 가족의 관계는 또한 그들의 공통의 주인인 그리스도 예수와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더 넓게는 빌레몬의 가족과 그의 집에서 모였던 교회 공동체에게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본문의 본론에서 ‘너’를 빌레몬으로 추정하여 수신자로 보는 전통적 견해도 일리는 있지만, 문맥과 문맥 사이에 숨어있는 그 시대의 문화, 사회적 상황까지 유추해 보았을 때, 바울은 본 서신을 빌레몬 한 사람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압비아, 아킵보,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교회에게도 공동의 수신자로 보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의 본론에서는 빌레몬을 그 가족 공동체의 대표로 대표성을 부여하고 그를 호칭했지만, 사실은 그 가족 전체를 언급한 것이다. 그 이유는 빌레몬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 각각의 구성원들이 그 집안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각각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라는 혁명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는 죄된 행동과 감옥에 묶임과 갇힘을 당하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연대 속에서 묶임과 갇힘을 당하는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공동체의 “각각”의 구성원들이 그를 환대하라는 바울의 심장 깊은 곳의 표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