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의 의미
이 책은 읽어 가면 갈수록 계속해서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낯선 책이었다.
처음 시작부터 ‘누멘’, ‘누멘적인 것’ 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개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오토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마 지금도 그가 말한 것을 어느 정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책이 어렵게 느껴졌던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용어와 낯선 개념들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한 사람의 독자인 내가 가지고 있던 신앙적, 신학적 배경이 가지고 있는 믿음, 혹은 선입견과 전제가 그의 주장과 부딪히면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지점보다는 대립의 각이 더 날카롭게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 신앙의 여정 가운데 종교적 체험과 감정에 목매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촌스럽고 무식한 감정 주의자 같이 여겨지는 것 같아 신앙에 있어 이 부분은 잊고 살거나, 가볍게 무시했던 것 같다.
이번에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읽으면서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보다는, 종교적 체험과 감정이라는 것으로 누멘과 누멘적인 것을 정의 내리기는 한계가 분명하다고는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합리적, 이성적 신앙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종교적 체험과 감정의 영역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오토는 종교는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한 대상이 어떤 특별한 경우에 생각되건 생각되지 않건, 느껴지건 느껴지지 않건 간에 그 대상이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사유가능하게 될 때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고 반대로 그 대상이 느껴지건 느껴지지 않건, 생각되건 생각되지 않건 간에 이러한 개념적 명증성의 영역밖에 우리의 개념적 사유로는 잡히지 않는 것을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성스러운 것은 이러한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고 정의한다. (나는 ‘비합리’보다는 ‘초합리’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성스러움’이라는 감정의 고유함을 표현하기 위해 “누멘적인 것(das Numinose)”이라는 말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이 말은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인 ‘누멘(numen)’에서부터 나온 표현이며, 현재의 ‘성스러움’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있는 도덕적이거나 그 밖의 여러 비종교적인 요소들을 걸러내어 순수하게 본래의 종교적 의미만으로서 ‘성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이다.
그는 성스러운 것에 있어서 윤리적, 합리적 요소들을 모두 제외한 특수한 이름을 찾을 필요가 있고, 그것을 라틴어의 ‘누멘’ 이라는 말로부터 ‘누멘적인 것’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말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어떤 대상이 누멘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마다 나타나는 누멘적인 마음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누멘적인 대상을 대면함에 있어 자신을 무(無)로 인식하게 하는 "피조물 의식" 혹은 "피조물적 감정" 이 나타난다. ‘피조물적 감정’ 이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자를 대할 때 자신의 ‘무’(無)속으로 함몰되고 사라져 버리는 피조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피조물적 감정이란 오히려 주관에 나타나는 하나의 수반적 요소 내지 결과로써, 틀림없이 내 밖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대상과 일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어떤 다른 감정적 요소(즉, "두려움")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상이야말로 곧 누멘적 대상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오직 누멘의 현존이 체험되는 곳에 혹은 누멘적 성격을 지닌 어떤 것이 느껴지는 곳에, 따라서 누멘적이라는 범주가 어떤 실재하는 혹은 상상적인 대상에 적용될 때만이 비로소 그 반영으로서의 피조물적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성격은 객관적인 측면에서 또다시 두 가지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하나는 "두렵고 떨리는 신비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홀리고 끌리는 매혹의 감정"이다.
오토는 전적인 타자에 대한 누멘적 감정에 대해 많은 설명을 했는데, 요약하면 ‘두려운 신비’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전적 타자, 즉 신에 대한 찬송에 있어서도 단순한 '합리적' 찬송과, '두려운 신비'의 요소들에 따라 비합리적인 것과 누멘적인 것에 대한 감정까지도 표현하는 찬송에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즉 전자의 밝고 합리적이고 친근한 찬송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신의 영광'에 완전히 합당한 것은 아니며, 누멘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찬송은 근원적으로 신의 비의(秘意) 앞에 서 있는 존재의 두려움, 압도, 매혹의 요소와 닿아있음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토는 ‘거룩’의 개념을 초세상적이며, 절대적 선으로부터 구별되며 가치와 관련된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거룩’이라는 용어 대신 누멘적 요소로서 ‘장엄함’이 거룩함을 대신하여 적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장엄성은 하나의 객관적인 가치로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궁극적이며 무한한 가치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객관적 가치들의 비합리적 기반과 원천이 되는 누멘적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장엄성의 체험에서 인간이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성과 현존 자체의 확실한 평가절하이고 이 장엄한 누멘 앞에 선 인간의 전적인 속된 감정을 좀 더 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죄’, ‘속죄’, ‘구원’이나 ‘해탈’과 같은 종교의 궁극적 목표에 관한 주제들을 감정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오토가 ‘죄’ 가 무엇인지는 ‘자연적’ 인간은, 아니 도덕적 인간조차도 이해 못한다고 지적한 바는 맞다. 여기서 오토는 ‘가리움’ 이란 요소를 설명한다. 즉 속된 자가 무엇이든지 지니지 않고서는 누멘에 접근할 수 없다는 감정으로서, 누멘의 진노에 대하여 어떤 가리개와 방패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가리개는 하나의 ‘성화’, 즉 접근자로 하여금 두려운 위압성과 더불어 교제를 가능케 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속된 존재로서의 인간은 장엄한 것에 가까이 설 가치가 없다는 감정,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가 성스러운 것 자체를 ‘부정’ 하게 만든다는 감정으로까지 발전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속죄’의 필연성과 갈망이 나타나는 것이며, 누멘과의 인접과 교제, 즉 피조물로서의 인간 존재, 속된 자연적 존재 자체로 우리를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무가치를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오토는 기독교에서는 이 속죄의 길, 방법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교적 가치평가의 고유한 세계에 들어가서 스스로의 마음속에 그것을 일깨워 갖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그 통찰들의 진리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누멘적인 것에 대한 체험이 곧 ‘구원’이며 ‘해탈’이라는 것이다. 또한 누멘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이것을 통해 일상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지고한 엑스터시(ecstasy)를 누리는 것이 종교적 구원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구약과 신약 텍스트 속에서 누멘적인 것들을 설명하였다(12,13장). 구약에서는 출애굽기 4장, 이사야서 6장, 예레미야서 10장, 욥기 38장을,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마태복음10장 28절, 히브리서, 로마서 본문을 인용하여 누멘적 표현들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각각의 상이하고 다양한 텍스트들의 내용을 ‘누멘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설명해 버림으로써 그것들이 쓰인 각각의 문맥과 배경에 대한 설명, 각 저자의 의도에 대한 이해 없이 획일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사실 감정은 각 개인들에게 있어 매우 주관적인 영역이며,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타자에게 전달해 줄 수도 없을뿐더러, 언어적으로도 그 감정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그런데 오토는 그 명쾌하지 않은 ‘누멘적 감정’ 속에 종교의 본질이 있으니, 그것을 텍스트 속에서 찾으라고 주장하다. 과연 종교는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며, 각각의 다른 성경의 텍스트들을 동일한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설령 오토가 주장한 ‘누멘적인 것’이 모든 종교적 체험의 바탕을 이루는 기초적 감정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감정 체험 자체는 종교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바가 아니며 종교적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도 아닐 것이다.
레위기를 통해서 배운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존재적으로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어떤 대상도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없고, 그와 관계 속에서만 다른 피조물과 장소가 파생적으로 거룩해진다고 믿는다. 그것은 단순히 오토가 말하는 신적 존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운 신비적 체험이나 감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는 것이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거룩은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분이 절대선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동일한 짐인 ‘죄의 문제’, ‘속죄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인간 내면의 종교적 감정과 체험에서 찾으려는 오토의 시도는, 물론 그 시대적 철학적 배경이 있었음을 알고 있지만,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많은 아쉬움과 한계를 보여주었다.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1장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 의 실체 (0) | 2021.04.04 |
---|---|
빌레몬서 수신자 찾기 (0) | 2021.04.04 |
레위기23-24장 절기와 성소의 기물들 (0) | 2021.03.15 |
레위기21-22장 제사장과 제물의 자격 (0) | 2021.03.14 |
레위기17-18장 피 금지 규례와 성도덕 규정 (0) | 2021.03.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