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제목: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본문: 요한복음 4장 1~ 42절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었고, 삶의 갈증과 허기짐으로부터 채워지고 싶었고, 그분을 예배하고 싶었으나, 막상 그 기회가 왔을 때는, 여전히 주저함으로, 새로운 기다림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지난 시간에 사마리아인들의 타헤브 사상에 대해, 이스라엘의 시간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 또 이 이야기에 배경이 되는 장소, 상황 등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기억하고 계시길 바라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처음에는 가볍게 물을 달라는 요청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진리를 요구하셨고, 그 다음에는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7절에서 물 좀 달라는 요청에서 대화를 시작했지만, 13,14절에 오히려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는 초대의 메시지를 던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초대에 여인은 관심이 있는 듯 보입니다. 삶에 아마도 지쳤었을 이 여인은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18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즉 그 여인의 은밀한 개인적인 결혼생활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을 보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이 분이 오랫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이 기다려왔던 타헤브라고 생각합니다.
19절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9절에서는 유대인의 한 남자로,19절에서는 ‘주여’라고 우리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Lord가 아닌 sir, 즉 우리말로 ‘선생님’으로 번역되는 것이 맞습니다. 아마도 평범한 한 유대인 남자로 보였던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왠지 모를 비범함을 느꼈었을 이 여인의 주님을 향한 호칭은 ‘선생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은‘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오랫동안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려왔던 그들의 타헤브를 만났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다양한 메시아 사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 타헤브에 대한 지식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분이 타 헤브라고 확신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계속해서 예배의 장소 문제로 대화를 계속합니다. 왜냐면 이 여인은 자신이 선지자로 인식한 예수가 예배처소 문제를 어떻게 말하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듣고 싶었던 ‘정답’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1절입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1절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믿으라는 단어가 예수님께서 특별히 믿지 않은 유대인들과 논쟁할 때 많이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또 우리말의‘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는 미래형의 어감이지만, 영어식 표현은 ESV, NIV에서 'the hour is coming' 현재 진행형으로 사용하며, KJV에서는 심지어 단순 현재형으로‘The hour cometh'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이미 2장에서 성전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예배할 장소에 대한 기대는 이미 인자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배할 미래의 성전, 진실한 예배자는 이미 도착했고, 지금 이 여인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이미, 예배는 현재이고,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할 미래의 어느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이것은 그녀 앞에 현재의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23절) 예수는 우리의 현재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현재인 것입니다.
26절에 주님께서 주님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마을로 들어가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의 행한 일을 전하고, 그 동네의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게 됨을 39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예수를 사마리아의 구주도 아니요, 유대인의 구주도 아니요,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그들에게 전해줬던 예수님의 행한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은 후에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마리아 여인은요?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답니다’라고 하는 해피엔딩이었을까요? 안타깝게도 29절의 여인의 말을 보자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보다는, 여전히 유보적인, 뭔가 조심스러워하고 주저하는 마음이 헬라어 부정사 ‘메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제 마음도 여러분의 마음도 이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있었기를 바라겠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나온 질문이라기보다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어떤 분이심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는, 이끌어내는 질문이며 가장 좋은 선교사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에 조금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왠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결말을 얻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해석같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문은 어떤 결말도 우리에게 주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답답하죠.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니고데모처럼, 오히려 그 당시에는 거듭남과 영생의 문제 앞에 머뭇거렸지만, 후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라도 있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사마리아 여인은 오늘 본문 이후에 어디에서도 다시 언급되는 곳이 없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불편하고 찝찝합니다.
러나 이 불편하고 찝찝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잘 만들어지고 화려한 대형교회나, 아니면 반대로 예수원과 같은 조용하고 일상에서 떨어진 곳에서만 예배를 드릴 때 마음에 평화가 임하는 것 같으십니까?
주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매일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는 믿음보다는 표적과 기적 같은, 뭔가 드라마틱한 일들로 주님께서 보이시고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야만 더 ‘확실히’믿는 것 같으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하는 우리 인생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4장에서 계속되는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는 이야기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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